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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의 이해 9] 교역항의 개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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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41회 작성일 23-10-20 11:33

            본문

            교역항의 개발, 네번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봅니다.


            12. 부산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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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다대포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사진: 부산관광공사] 



            부산의 다대포는 국제교역항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나 일본열도를 오가는 선박들의 기항지 역할을 하였던 포구로 추정된다. 

            다대포의 지형은 범선이 안전하게 정박 하여 바람이 익는 것을 기다릴 수 있고, 또 범선이 쓰시마를 향하여 쉽게 포구를 빠져나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본서기』 진구(神功) 5년(325년으로 추정) 기사에 보이는 왜인의 신라 침공 주요 루트인 다다라노쓰(蹈鞴津)나 529년(계체 23)에 신라에 함락된 다다라(多多羅)도 다대포로 비정되고 있다. 

            그리고 대방 사신선도 다대포를 경유 하여 일본열도를 오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들은 다대포가 원삼국시대부터 교역항으로 이용되었던 정황을 보여준다.


            신라는 575년에 多多羅(다다라) 須奈羅(수나라) 和陀(화타) 發鬼(발귀) 4邑(읍)의 調(주), 즉 이른바 ‘任那調(임나주)’를 보냄으로 써 왜국과의 화해를 도모하였으나, 그 후 다시 신라가 위압적 자세를 보여 한동안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610년 이후로는 왜국에 대하여 자주 외교 사절을 파견하였으며, 그중 서너 차례는 任那使人(임나사인)과 동행한다는 명목으로 더 많은 방물을 전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태식교수의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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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대포항 지도, 사진: youtube] 


            다대포 외에도 부산의 수영만과 부산포도 교역항으로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영만은 이 지역에서 고대 해상 교통의 요항이었다. 

            강의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불과 6km 이내에 동래 복천동 내성 유적, 동래 패총, 동래 복천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 군 등의 유적들이 분포되어 있다. 즉 이 지역에 거대한 세력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영만이 초기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이 유적 집단들의 교역항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내성 유적에서는 다량의 야요이식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BC 2세기의 유물들이었다. 

            또 동래 패총에서는 3〜4세기 초로,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4〜5 세기로 편년되는 일본의 토사기계(土師器系) 토기들이 출토된 바도 있다. 일본열도와의 이러한 교류에 수영강 하구가 그 통로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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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사진: 경향신문] 



            부산포는 동남 지역에서 가장 광대한 후미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이 후미는 바깥 바다 곧 조도(朝島) 밖의 대양에서 7km나 깊숙이 들어와 구부러진 곳의 안쪽에 위치한다. 이러한 지형 조건은 안전한 포구의 조건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고대에 범선으로 남해안이나 동해안 지역에서 쓰시마나 일본열도로 향하고자 할 때에는 기항지로 이용하는데 불편한 점으로 작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산 이동지역, 예컨대 울산, 경주, 포항 등과 같은 동해안 남부 지역에서 쓰시마로 항해할 경우에는 수영만까지 와서 바람을 기다렸다가 출발하고, 동래 지역에서는 수영만이나 혹은 부산포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산이나 김해와 같은 낙동강 하구 지역과 남해안 서부 지역에서는 다대포를 이용하는 것이 더 편리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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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포는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해전이 벌어지던 곳이다. 사진: adipo.tistory]​ 



            13. 울산만·영일만 지역 


            울산만과 인근 해안 지역도 신라시대에 교역항으로 개발되었다. 사포(絲浦)는 울산만에 위치하였던 신라의 국제교역항이었다. 

            『삼국유사』 황룡사 장륙기사에 6세기 진흥왕 때 큰 선박 한척이 하곡현(河曲縣) 사포에 와 닿았는데, 황철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분分을 싣고 있어, 이것을 가져다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였다고 한다. 

            또 『동국 여지승람』 울산군 기사의 김극기(金克己) 시(詩) 서문에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구법을 마치고 643년에 귀국하면서 사포에 정박하였다고 언급되었다. 

            이처럼 사포는 신라시대 에 국제교역항이었고, 울산만의 양호한 포구 조건으로 볼 때 고대에도 교역항이 개설 되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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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석유제품, 자동차, 선박의 주요 수출항으로 국내 무역수지를 선도하는 울산항, 사진: 국제신문]​ 



            고려시대에 사포는 곡포(谷浦)로 불렸으며, 곡포 가 위치한 하곡현은 본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지금의 울주군 범서읍 굴화리로 비정된다. 

            그런데 2008년에 태화강 하구 반구동에서 신라의 관문항구 유적으로 추정되는 목책시설과 7세기 신라시대의 기와편이 다수 출토됨으로써 이 부근이 사포였을 가능성도 있다.

            율포(栗浦)는 418년(눌지왕 2)에 박제상이 왜국에 볼모로 가있던 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하여 출항한 곳으로 신라의 교역항으로 인정될 수 있는 곳이다. 

            율포의 위치는 경주와 울산 간의 지리적 조건으로만 보면 울산만 내의 포구로 여겨진다. 그러나 문헌 고증의 차이에 따라 울산만, 울산시 북구 정자리 포구,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진리 포구 등으로 견해가 엇갈린다. 

            율포와 관련하여 탈해왕의 도래지인 아진포(阿珍浦)도 신라 초기에 교역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진포의 현재 위치는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이며, 나아리에는 1845년에 건립된 ‘석탈해왕 유허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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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가 아진포로 가로로 누운 주상절리가 인상적이다, 사진:kelim.tistory] 



            영일만도 신라시대에 교역항으로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일만은 북쪽으로 트인 포구로서 경주에서 동해 북쪽의 해안 지역과 교통할 때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는 포구다. 

            영일만은 왜인들이 신라를 침입한 루트로도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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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영일만의 역할, 사진:한국경제] 



            459년(자비왕 2)에 왕성에 침입해온 왜인들을 신라가 북쪽 바다 어귀까지 추격하였던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에 왜인이 자주 침입하였던 사도(沙道)가 영일만 부근으로 비정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 초기에 영일만에서 해상 활동이 빈번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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