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 문화] 제주해양문화 유적지 소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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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 문화] 제주해양문화 유적지 소개 ①
[이어도연구회]에서는 '해양아카데미'를 통해 제주도의 해양문화유적지를 소개하는 강의가 있습니다.
이번 코너에서는 그 주옥같은 강의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해양문화란?
[해양문화 서적(출처:교보문고)]
‘해양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해양문화에서 ‘문화’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는 영어로 Culture이며, 라틴어 Cultura에서 파생되었고, ‘경작’이나 ‘재배’를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교양’이나 ‘세련’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문화에 이루게 되었다고 전해진다.(가톨릭대학교 출판부, [라틴-한글사전], 1995)
경작이나 재배라는 의미가 문화라는 의미라면, 인류가 채집 생활에서 벗어나 생존을 위해 곡식을 생산하기 위해 경작과 재배 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되풀이되는 거친 자연의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체득한 내용, 마을과 국가를 만들어가는 내용, 등을 후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전달 방법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미술, 음악, 건축, 책, 구전, 등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세계 유산 센터 - 초기 고고학적 유적지와 문화 다양성의 시작]
문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으며, 크게 다섯 가지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다.
첫째는 토지, 곡식 재배, 경작의 개념이며, 둘째는 정신, 예술 및 문명의 배양이고, 셋째는 사회의 일반적인 발전과정의 개념이다.
넷째는 민족, 집단, 계층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공유하는 의미, 가치, 생활방식의 개념이고, 마지막으로 의미를 만들고 실천해 가는 것이다.
이런 문화의 개념을 토대로 하여서,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에서는 해양문화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해양문화-관광 편]
1) 수산이나 해운 등의 바다를 통한 삶
2) 해양과 관련된 정신, 예술, 문명
3) 해양과 관련한 사회의 발전 과정
4) 해양과 관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의미, 가치, 생활방식
5) 해양과 관련하여 의미를 만들고 실천해 나가는 것
위의 해양문화 정의를 기반으로 하여 해양문화유적을 국내외의 해양문화유적을 살펴보면, 바다라는 환경에 의지하여 생활을 영위한다는 측면에서 많은 부분이 유사하지만,
지역환경과 지역민의 가치 및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측면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전 세계의 많은 등대가 절벽 근처에 위치한다는 것에서는 유사하지만, 등대 디자인이나 등대지기의 생활양식은 상당이 차이가 있다.
호주 바이론 베이 등대와 제주도의 산지 및 우도 등대가 절벽 근처에 위치하고, 등탑 디자인도 유사하지만, 등대에서 거주했던 등대지기의 삶은 상당히 다를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등대 외에도 남해안에 가면 멸치와 같은 작은 물고기를 잡는 방식으로 ‘죽방렴’이 활용하는데, 죽방렴은 대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도 제주도의 ‘정낭’과 유사한 구조가 대문 역할을 담당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런 해양문화유적은 해안지역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의 가치관 및 생활양식 등을 반영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바다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제주도 동쪽 지역의 해양유적답사를 통해 해안지역에 거주했던 옛사람들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조명해보고, 해양문화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제주도 동쪽 지역 해양문화 유적은 크게
1) 제주도의 해양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등대’,
2) 제주민들의 생활과 마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용천수’,
3) 해녀문화 유적,
4) 외적의 침입의 방어를 위한 ‘진성과 연대’로 분류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죽방렴(출처:동아일보)]
산지등대
산지등대는 제주항 및 부근 해역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 운항을 위하여 1906년 대한제국 세관공사와 등대국 소속으로 출발하여,
1916년 10월 30일 무인등대에서 1917년 3월 유인등대로 변경되어 1999년 12월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왔다.
현재 등대는 2002년 12월에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된 고광력 회전식 대형등명기로 교체되었고 불빛은 15초에 1번씩 반짝이며,
빛은 48㎞ 떨어진 곳까지 도달한다. 광파표시 등명기의 등질은 섬백광 1.5초 1섬광으로 광달거리는 42㎞이다.
그리고 음파표지의 경우, 음달 거리는 6㎞이며, 등명기·발동발전기·무신호기·충배전함·정류기 각 1대가 있다.
고광력 회전식 대형등명기로 교체되었고, 불빛은 15초에 1번씩 반짝인다.
산지등대의 등대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산지등대가 위치한 마을이 1702년(숙종 28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순력 중에 화공 강남길로 하여금 제작토록 한『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산지촌(山地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산저(山底)였다가 산지(山地)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 즉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 상류의 가락쿳물(오현단 동쪽)이 건입포를 지나서
바다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산저라고 하였던 것이 산지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 한라산 줄기인 사라봉이 북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해안가에 이르러
다시 솟구쳤기에 산지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제주 시내를 관통하는 큰 내천이 산지천이며, 산지등대는 산지천과 가까운 곳에 있다.
[제주항 산지등대(출처:Visit Jeju)]
산지등대가 건설된 이유는 조선시대보다는 일제강점기에 산지항 현재의 제주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11년 1월 20일 부산·제주 간 부제선 노선을 인가하였으며,
기항지는 장승포, 구마산, 마산, 통영, 욕지도, 삼천포, 여수, 나로도, 거문도, 조천, 산지, 추자도였다.
부산에서 제주도 산지와 조천으로 들어왔다.
목포에서 출발하여 제주도로 들어오는 목제노선은 1913년 취항하였으며,
이 노선은 제주도 산지항에 도착한 후 제주도의 다른 어항인 조천, 김녕, 성산, 표선 등의 항구를 기항한 후 서귀포항에서 목포로 출발하기도 하였다.
산지항은 국제적인 항으로 오사카까지 가는 항로가 개설되었으며, 1939년 판제선(阪濟船)이 오사카에서 시모노세키,
부산항을 거쳐 산지로 들어왔으며, 제주도 해안을 한 바퀴(산지, 애월, 한림, 고산, 모슬포, 서귀포, 표선, 성산포, 김녕, 조천, 산지) 돌고,
다시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이 항로는 일본 오사카 상인들이 제주도를 돌면서 사들인 해산물과 해초를 비롯하여 인력들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는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산지항에 큰 배들이 드나들게 된 이유 중에는 항구를 넓히는 물양장 공사, 방파제 공사 등이 1926년이 이루어졌으며,
1939년에는 1천 톤급 선박이 접안능력을 갖추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제주항은 1926년부터 산지항이라 명명되었다.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 「항만변천사」, 2001, p.321.)
국립박물관 소장 산지등대 설계도면에 의하면, 20평 규모의 일본식 목조형 숙소 건물 1개 동과 15평 규모의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면을 보면 등대의 보급품 등은 배로 싣고 와서 산길을 거슬러 올라서 등대로 갔음을 알 수 있다.
[우도의 산지등대(출처:Visit Jeju)]
https://blog.naver.com/ieodoresearchkorea/223121806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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