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의 이해 8] 교역항의 개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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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항의 개발, 세번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봅니다.
10. 경상도 남해안 지역
섬진강 하구에 백제시대 교역항으로 다사진(多沙津)이 개발되었다. 다사진은 오늘날 하동으로 비정되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하동군은 본래 한다사군(韓多沙郡)이며, 하동 악양현은 본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라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다사진이 대사(帶沙)로도 표기되며, 다사진은 백제가 왜국과 교류할 때 이용하였던 중요한 포구였다. 이 다사진은 한 때 대가야도 교역항으로 이용하였다.
늑도는 초기철기시대 및 원삼국시대에 남해안 연안항로의 거점이자 국제교역항이었다.
사천(삼천포)과 남해 창선도 사이의 협수로 중앙에 위치한 작은 섬인 늑도 패총에서 BC 2세기에서 AD 3세기에 걸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BC 175년에 제작된 사수반냥(四銖半兩)과 한나라 때의 오수전, 판상철부(板狀鐵斧) 등이 다량의 낙랑계 토기, 야요이계(彌生系) 토기와 함께 출토됨으로써, 이 섬에서 국제교역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늑도는 고대 남해안 연안항로의 길목에 위치한 섬으로 인근의 사물국(史勿國, 지금의 사천시), 고자국(古自國, 지금의 고성군) 등 포상팔국(浦上八國)과도 밀접하게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 초기 12조창 가운데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늑도 인근의 사천시 용현면 통양리에 설치되었던 것도 참고된다.
[아름다운 늑도의 전경, 사진:경남신문]
고성 지역에도 원삼국시대에 교역항이 개발되었다. 고성은 소가야국의 치소로 이미 삼국시대에 인구 밀집 지역이었고, 고성읍 동외동 패총에서 후한 전기의 동경 그리고 일본열도와 관련된 광봉동모(廣鋒銅鉾)가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낙랑군 및 일본열도와 해로를 통해 교역하였던 것이다. 교역항으로는 고성읍과 인접한 남쪽의 고성만 포구가 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성읍 동쪽의 마암면과 동해면 그리고 거류면에 삼국시대 고분이 다수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쪽의 진해만에 인접한 당항만과 적포만에도 교역항이 개발되었을 것이다.
[경상남도 지방어항 중 하나인 고성포구, 사진:세계환경신문]
마산만의 포구도 원삼국시대에 국제교역항으로 개발되었다. 변진의 철은 낙랑과 왜를 비롯하여 삼한 여러 나라와 교역되었는데, 마산만 인근에는 창원시 외동 성산 패총, 가음정동 당산 패총 등에서 철이 생산되었다.
특히 성산 패총에서는 BC 73년 이후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전한의 선제오수(宣帝五銖)가 출토되었고, 삼동동 석관묘에서는 일본산으로 추정되는 동촉(銅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마산만을 통하여 국제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서술된 물계자전(勿稽子傳)에 의하면, 마산만에는 3세기 초기에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골포국(骨浦國)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곳은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마산만의 교역항과 관련하여 고려 초기 12조창 가운데 하나인 석두창(石頭倉)이 골포에 설치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대 가야국은 6개국 아닌 12개 이상 나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 사진:가야고분군]
창원시 진해구의 웅천 지역에도 교역항이 개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성내동 자마산 정상에는 원삼국시대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명한 웅천 패총이 있고,
같은 곳에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웅천 고분군과 웅천 고산성古(山城)도 위치한 것으로 보아 고대에 이곳은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웅천은 남해안 연안항로의 길목에 위치하며, 고대에는 김해, 부산쪽과 1일 항해 거리였다. 즉 이곳은 자연스럽게 교역항이 개발 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일본서기』 529년(케이타이繼體 23) 기사에 신라·백제와 교섭하기 위하여 모야신(毛野臣)이 도착하였던 웅천(熊川)도 지금의 진해구 웅천 지역에 비정되고 있다.
또한 시기는 늦지만 조선 초기에 개항된 삼포의 하나인 내이포(乃而浦)가 웅천의 제포(薺浦)에 개설된 것도 우연은 아니며, 고대의 대일교역항으로서 이곳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하겠다.
11. 낙동강 유역
낙동강 하구의 김해는 가락국(본가야)의 도읍지이자 국제교역항이었다. 이 지역의 주요 무역품은 철이며, 실제로 회현리, 부원동, 예안리 유적 등에서 여러 가지 철기들이 출토되었다.
김해는 낙동강을 통한 내륙 수로가 편리하고, 또 바다 어귀에 위치하여 해로를 통한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배후에는 김해평야가 있어 식량 조달도 용이한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가락국은 교역이 활성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해시 회현리패총에서 1세기 왕망시대의 중국 화폐인 화천 1개가 출토되었고, 양동리 유적에서는 여러 점의 중국제 청동거울이 출토되었는데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식별되는 3점의 후한경(後漢鏡)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지내동 옹관묘 속에서는 야요이 문화 중기(BC 100〜AD 100)의 수구식(須玖式) 호형토기(壺形土器) 1점이 출토되었다.
이러 한 유물들은 BC후 시기에 낙동강 하류 지역과 낙랑군 그리고 일본열도 간에 해상을 이 지역에서는 고대의 포구 유적도 발견되었다.
2005년에 김해시 장유면 관동리에서 삼국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목재 잔교(棧橋) 시설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잔교의 존재는 이곳이 당시에 교역항으로 이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잔교는 서낙동강 지류인 조만강 상류의 율하천에 위치하여 여기에서 낙동강 하구를 거쳐 강 상류 혹은 바다와 해상을 통한 교통이 이루어졌다.
김해의 해양환경적 특징으로 볼 때, 조만강 상류에는 관동리 외에 다른 포구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추후 고고학적 발굴이 기대된다.
[본가야의 의미, 사진:wordrow]
가락국의 교역항으로 허황후가 도래하였다는 주포(主浦)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 타난다. 주포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엇갈려 진해 가주동,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장작나루터, 강서구 미음동 와룡마을 나루터 등으로 비정되고 있다.
가락국의 또 다른 교역항으로 김해시 동쪽 서낙동강변에 위치한 불암진(佛巖津)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불암진은 김해부로부터 10리 거리의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김해와 동래·양산 간을 이어준 나루터였다.
불암진은 특히 회현리 패총, 부원동패총, 봉황동패총, 지내동 옹관묘 등 초기철기시대 유적들과 인접해 있는 나루터이다. 이처럼 그 시대에 인구 밀집 지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불암진이 교역항으로 개발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민족고전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진: KDI 경제정보센터]
낙동강하류 양산의 황산진(黃山津)도 삼국시대에 교역항으로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양산지역이 대체로 5세기 전후에 신라에 편입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황산진은 늦어도 6세기경에는 신라에 의해서 낙동강 하류의 교역항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삼국사 기』에 의하면, 587년(진평왕 9)에 대세와 구칠이 여기에서 선박을 타고 떠난 것으로 보이며, 또 시기는 늦지만 우징(신무왕)이 왕위쟁탈전에 실패하고 837년(희강왕 2)에 선박을 타고 청해진으로 망명하였던 곳이다.
[자료출처: 한국해양재단 해양교육포털 한국해양사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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