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이야기] 트라팔가 전투와 명량대첩(1) > SNS속 이어도

본문 바로가기
          • 여기는  대한민국 이어도  입니다
          • IEODO


             

            [바다이야기] 트라팔가 전투와 명량대첩(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36회 작성일 23-05-18 20:42

            본문

            [바다이야기] 트라팔가 전투와 명량대첩(1)

             

            바다이야기, 세계의 해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 비견되는 세계적인 해군의 우상인 '넬슨'제독이 이끈 '트라팔가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겠습니다.


            a55cbc3e6e19a3f1c1ed59ede96a64e0_1687877313_1065.png

            [명량대첩, 그림 출처 : 트위터] 

             

            허레이쇼 넬슨 제독은 영국에서 이순신처럼 뛰어난 해전의 장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순신과 넬슨은 비슷한 여정을 거쳤습니다. 

            둘 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영웅이었으며, 한때 직위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와 전투했습니다. 

            해전 중에는 적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말도 비슷했습니다. 

            이순신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했고, 넬슨은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가려라"고 했습니다. 

            이는 지휘관의 죽음이 알려지면 상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a55cbc3e6e19a3f1c1ed59ede96a64e0_1687877346_6408.jpg 

            [넬슨과 나폴레옹, Lord Nelson and The Battle of Trafalgar, 사진 출처 : British Heritage Travel]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기까지 약 네 시간 동안 용감하게 행동했습니다. 

            심지어 총탄에 맞고 신음하며 신병들에게 신속한 치료를 요청하면서도 전투 지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최종 승전 보고를 받았을 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적선을 나포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가 15척을 나포했다고 대답하자, "나는 20척을 예상했는데..."라며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확인된 결과, 넬슨은 실제로 21척의 적선을 나포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넬슨의 상황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에피소드입니다.

             

            트라팔가 해전은 영국 해군이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와 맞서 싸운 해전으로, 영국이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압승을 거둔 역사적인 전투입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나폴레옹 치하 아래 유럽에서 최강의 육군력을 가진 강대국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들의 연합함대에는 '무적함대'로 알려진 스페인 함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스페인 함대는 33척의 군함으로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이에 비해 영국 함대는 단 27척에 불과했습니다.

             

            a55cbc3e6e19a3f1c1ed59ede96a64e0_1687877371_279.png 

            [영화 '명량'포스터, 출처 : London Korean Links]

             

            한편,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인 명량해전은 전란 중인 1597년에 일어난 전투로, 명량 수도라 불리는 전라도 해남과 진도 사이의 해역에서 일본 군함 133척과 조선 군함 13척이 맞붙었습니다. 

            이때 조선 함대는 적에 비해 10분의 1에 불과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승리하였습니다. 

            명량해전은 전투력으로는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략과 지휘력으로 승리를 이끈 이순신의 위업을 상징하는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126년에 걸쳐 벌어진 해전들의 종지부로, 범선시대의 마지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는 약 5000여 명의 전사와 부상자를 내고, 8000여 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군함은 21척이 영국 함선에 의해 격파되었고 1척은 전복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 함대는 단 한 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전투로 인한 피해는 약 400여 명의 전사자뿐이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은 서양의 명량대첩으로 불리며, 그 중요성과 위력을 상징하는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해전은 장기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에서 결정적인 전투로서, 영국의 승리와 함께 범선시대를 마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a55cbc3e6e19a3f1c1ed59ede96a64e0_1687877389_6473.jpg 

            [트라팔가 100주년 기념우표, 출처: British First Day Covers]

             

            2005년은 트라팔가 해전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국은 포츠머스 항에서 국제 관함식을 개최하고 전 세계의 군함을 초대했습니다. 

            이 관함식은 32개국의 군함 168척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였습니다. 

            당시 영국 관함식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군함은 '빅토리'호였습니다. 

            '빅토리'호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타고 영국 함대를 지휘한 기함이었습니다. 

            이 군함은 최고령으로 자랑스러운 243세를 기록하며, 현재에도 명예 기함으로서 영국 군함 명부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역 군함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빅토리'호는 영국 해군의 역사와 전통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함선으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질 당시에는 영국이 이미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였습니다. 

            이전에도 1588년에는 칼레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제압하여 영국 해군의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해상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면서 영국은 이러한 변화에 가장 유리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은 섬나라로서 신대륙 간의 상업 및 해운 업무를 중심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상선을 지키고 해상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군함과 해군의 역할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a55cbc3e6e19a3f1c1ed59ede96a64e0_1687877393_1954.jpg 

            전투 군함 배치도, 그림 출처 : KATE E. JAMIESON HISTORIAN & OUTDOOR AMBASSADOR'S BLOG

             

            영국이 유럽에서 주요 무역 국가로 부상하기 전까지는 네덜란드가 무역 최강국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세계 최초의 주식 거래소를 개설하는 등 무역과 금융 분야에서 선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이 네덜란드를 능가하여 유럽에서 최고의 해운무역국으로 발전한 이유 중 하나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51년에는 영국의 호국경(혁명정권의 최고 행정관)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이 "영국의 배와 영국 선원만이 영국 식민지에서 운반할 수 있는 상품을 운반해야 한다"는 항해 조례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네덜란드 해운업에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함대를 조직하여 영국에 대항했지만(영란전쟁, 1652~1674), 무역 분야에서는 영국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영국은 해전에서 우위를 점하며 네덜란드의 무역 우월을 깨뜨렸습니다.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경쟁을 통해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함 개발에 열중하였습니다. 

            플리머스와 포츠머스에 위치한 영국 왕립 조선소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꾸준한 군함 건조에 주력했습니다. 

            1793년부터 1805년까지 약 8년 동안 영국의 군함 수는 500척에서 950여 척으로 거의 2배로 증가했습니다. 

            이는 현대에서도 어려운 일로 여겨지는 기간 안에 많은 군함을 건조하여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업적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조선 기술 발전에는 프랑스 혁명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 온 조선 기술자들이 기여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많은 프랑스 조선 기술자들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그들의 기술과 지식을 전달했습니다.

             이들은 영국 해군의 조선 기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결과로 영국은 군함의 건조 기술과 선체 설계 등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a55cbc3e6e19a3f1c1ed59ede96a64e0_1687877396_912.jpg 

            [트라팔가 전투, 그림 출처 : U.S. Naval Institute]

             

            '트라팔가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번에도 계속됩니다.


            https://blog.naver.com/ieodoresearchkorea/22310300495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단법인 이어도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