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2012.6.8)대장정 신화의 절정 '루딩교 도강'… 현대중국 건설 다리를 놓다 > 언론 속 이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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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2012.6.8)대장정 신화의 절정 '루딩교 도강'… 현대중국 건설 다리를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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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51회 작성일 12-06-2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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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한 혁명에 신화가 존재한다면 중국 공산혁명의 신화는 대장정이다. 1934년 10월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장시(江西)소비에트를 탈출하며 시작한 장정은 겉으로는 기나긴 퇴각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은 370여일 동안 중국 대륙 9,600㎞를 가로지르며 공산 중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대장정>의 저자 헤리슨 솔즈베리의 말처럼 장정은 1789년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며, 191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이다. 그리고 장정 신화의 절정은 루딩교(瀘定橋) 도강이다.

            루딩교로 가는 길은 험했다.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에서 루딩(濾定)현까지 가는 왕복 2차로 도로는 해발 2,000m가 넘는 산을 타고 굽이쳤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점점이 흰 꽃이 반짝였다. 장정 당시 홍군(공산당 군대)이 루딩교에 도착한 때도 5월 하순이었으니 그들도 이 꽃을 보았을 것이다.

            창장 지류 중 하나인 다두허(大渡河)는 긴 여행을 시작하는 상류의 기백을 품고 흐르고 있었다. 그 위로 루딩교가 팽팽한 아치를 그리며 걸려 있었다. 길이가 100m 정도인 루딩교는 교각 없이 강 양편에 박은 어른 주먹만한 굵기의 쇠사슬 13개로 지탱된다. 바닥 쪽 쇠사슬 9개 위에 폭 3m의 널빤지를 깔았으며 양 옆의 쇠사슬 2개씩은 손잡이 구실을 한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인 1705년 만들어진 루딩교는 지금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본연의 기능은 인근 새 다리에 넘겨주고 입장료 10위안을 받는 기념물이 됐다. 다리는 연신 출렁였고, 널빤지와 쇠사슬 사이로 흰 물보라를 일으키는 급류가 보였다. 혁명의 성지를 찾은 사람들은 손잡이를 잡고 엉금엉금 다리 위를 오갔다.

            78년 전 홍군은 이 다리를 기어서 건넜다. 장정 중 준이(遵義)회의에서 권력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다두허를 건너면서 대담한 작전을 실행했다. 국민당군이 장악하던 다두허의 유일한 다리 루딩교를 탈취하기로 한 것이다. 국민당에 쫓기던 홍군은 이틀간 밤을 새워가며 행군해 루딩교에 도착했다. 홍군을 맞이한 것은, 널빤지는 사라지고 휑하니 쇠사슬만 걸려 있는 다리와 건너편의 국민당군이었다. 수류탄과 총으로 무장한 22명의 홍군 돌격대는 쇠사슬에 의지해 포복을 시작했다. 앞에서는 국민당군의 총알이 쏟아졌다. 4명이 희생됐지만 홍군은 결국 다리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적의 예상을 뒤엎는 특유의 전술로 마오쩌둥은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에서 공산혁명의 성공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루딩교를 건넌 지 30년이 흐른 1966년 마오쩌둥은 다시 창장을 건넜다. 73세였던 그는 우한에서 1,000m가 넘는 거리를 헤엄쳐 가로지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문화대혁명(문혁)의 발진이었다. 10년간 이어진 문혁으로 한때 혁명의 동지였던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고초를 겪었다. 루딩교 돌격대를 이끈 양청우(楊成武)도 옥살이를 피할 수 없었다. '반사회주의적 독초'를 뽑아낸다는 것이 문혁의 명분이었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둥이 벌인 권력투쟁의 성격도 짙었다. 숙청과 파괴로 점철됐던 문혁은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역류였다.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 주도한 두 혁명을 어떻게 기억할까. 루딩교에서 홍군복을 빌려 입고 기념사진을 찍던 30대 중국인은 "마오쩌둥은 신중국을 건설한 사람"이라며 "그의 잘못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서 일하다 문혁 때 군대에 가야 했다던 70대 남성은 "마오쩌둥이 없었으면 대장정도, 신중국도 없었다"며 "문혁은 잘못된 것이지만 마오쩌둥은 공이 더 크다"고 말했다. '공은 7할, 과는 3할'. 누구에게 물어봐도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덩샤오핑(鄧小平)이 1981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역사결의를 통과시킨 후 굳어진 가이드라인을 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공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신중국 건설이라고 했다. 공산 중국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셴원(張憲文) 난징대 교수는 "마오쩌둥의 가장 큰 업적은 외세로부터 중국을 독립시킨 것"이라며 "마오쩌둥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는 장제스가 미국 등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842년 아편전쟁 패배 후 중국 대륙은 100년여년 동안 외세의 각축장이 됐고 중화(中華)의 자존심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을 외세 침탈의 시대를 마감한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현대 중국에 남긴 또 다른 업적은 '강한 중국'의 건설이다. 마오쩌둥은 문혁의 혼란기에도 '양탄일성(兩彈一星)' 즉 원자폭탄, 수소폭탄, 인공위성의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핵무기를 보유한 중국은 이제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군사 강국이 됐다.

            중국 출장 중 TV를 켜면 남중국해 황옌다오(黃巖島ㆍ스카보러섬)를 둘러싼 필리핀과의 영유권 분쟁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격앙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중국이 영유권 분쟁을 하는 곳이 황옌다오만은 아니다. 일본과는 댜오위다오(釣魚島·센카쿠열도), 베트남과는 시사군도(西沙群島·파라셀군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으며 이어도까지 위협하고 있다. 중국이 외세로부터 독립을 넘어 이제 스스로 외세가 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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